산할아버지 산할아버지 산에서만 살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뒷산 양지 바른 곳에 누우셨다 산속에 묻혔으니 이제 할아버지도 산이다 산할아버지가 된 할아버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산에서 사신다 내가 좋아하는 내 동시 2021.10.06
내가 키우는 달 내가 키우는 달 나는 달을 키우고 있다 지난 겨울밤 동장군이 난리칠 때 학원 다녀오는 내 뒤를 따라 내 방까지 들어와 버린 초승달을 엄마 허락도 없이 몰래 키우고 있다 먹이도 목줄도 필요 없고 “월월”짖지도 않는다 얌전히 내 눈빛만 먹고 살아서 하늘에 풀어놓고 키워도 걱정 없다 어두운 밤길 나서면 나만 졸졸 따라 다니는 달 초승달, 상현달, 보름달 자라는 모습만 보아도 키우는 맛이 달달한 달 추운 오늘 밤에는 달달달달 떨고 있는 야윈 그믐달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 주었다 오래 내가 좋아하는 내 동시 2021.03.19
그릇 그릇 엄마 시집 올 때 따라와서 지금까지 식구들 밥을 챙기던 사기 밥그릇 하나가 깨졌다 말없이 따스함을 전해주던 그릇은 우리 곁을 떠날 때서야 “쨍강” 우는 소리를 낸다 헤어지는 건 다들 힘든가보다 내가 좋아하는 내 동시 2021.03.19
23.5도 23.5도 과학시간에 지구가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구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요만큼 그리움만큼 23.5도 기울어져 있는 걸까 그리움을 못 견뎌서 “여보세요, 거기 누구 없어요?” 자꾸 다른 별에 사람을 보내는 걸까 내가 좋아하는 내 동시 2021.01.14
초롱꽃 초롱꽃 길 옆 꽃밭에 사는 붉은 초롱꽃 초승달이 뜬 오늘은 길 쪽으로 꽃등을 내밀어 학원 다녀오는 누나의 어둠길 환히 밝혀주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내 동시 2021.01.14
개미 개미 길게…늘어선…개미…줄… 끝이…안 보인다… 개미들…아무리…멀리…가도… 돌아올…일…걱정…없다… 길을…가는…개미들이…바로… 집으로…돌아오는…길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내 동시 2021.01.14
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 문화재의 나무기둥을 닥치는 대로 갉아먹고 사는 흰개미 왕이 합천 해인사에 팔만대장경 있다는 소리 듣고 팔만 마리의 흰개미를 모아 팔만대장경 먹으러 경전각에 쳐들어갔다가 대장경에 숨어 있는 오천이백팔십여 만 자의 나라지킴이들한테 혼쭐이 나서 매화산으로 달아났데요 내가 좋아하는 내 동시 2021.01.14
새벽과 새벽 새벽과 새 벽 동 틀 무렵을 좋아한다, 나는 하루의, 시대의 시작이기도 하고 밤의 종말이기도 한 여명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둠의 목숨을 사랑한다 하얗지도 않고 까맣지도 않은 희부윰한 세상의 유일한 出口 빛과 어둠, 좌와 우의 내밀한 경계에서 나는 모든 고민거리를 해결한다 이념의 대립,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이 경계에 앉아 나는 또 한날의 새 벽을 뛰어넘는다 詩골 2021.01.14